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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사건

업무상 과실치사 — 1952년 부산, 평소라는 익숙함이 만든 한 번의 사고

 

 

 

 

 

「피고인은 약 9년간 대구운전사무소 기관사로 근무하는 자인 바, 단기 4285년 6월 18일 오전 8시 2분경 제6열차 「마터」 제22호 객차를 운전하고 부산역을 출발하여 대전행 목적으로 시속 약 20키로미터 내지 25키로미터 속도로써 부산시 초량역 흠 미달치안국 철도경찰학교 사무실 전 경부선에서 운행 중 기관사로 

 

항시 전방을 주시하여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주의의무가 유함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경적을 취명치 않고 만연 우 주의를 태만히 하여 부산철도경찰대근무 경사 공소외 4가 우 지점에서 횡단하고 있는 것을 우 열차를 정차치 않고 진행하여 동 열차기관차 좌측 선단과 상충돌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력상치사케 하였다」는 것인 바 

 

그 내용에 있어서 소론과 같이 전방의 주시의무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오 기관사는 항상 전방을 주시하여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의무있음을 추상적으로 설시하고 피고인이 경적취명 및 정지등 사고방지의무를 태만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거에 의하여 인정한 바 명백함으로 별도로 전방 주시의무의 태만에 관한 증거를 명시하지 아니하였다하여도 

 

이로서 원판결의 비위를 논할 수 없고 결국 논지는 원판결의 문의를 곡해한 것에 불과한 것에 불과함으로 이유없다 할 것이다.”

 

이 판결문에 등장하는 단기 4285년 6월 18일은 몇 년 몇 일 이었을까요? 

단기 연도에서 2333을 빼면 서기 연도가 나옵니다. 4285 - 2333 = 1952 

즉, 이 사망 사고가 발생한 날은 서기 1952년 6월 18일입니다. 

 

 


 

6.25 전쟁 중의 임시수도 부산 

 

1952년은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고, 당시 부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Provisional Capital)였습니다. 판결문에 나오는 '부산역 출발', '초량역 부근'이라는 배경은 당시 국가의 심장부 역할을 했던 부산의 긴박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모바일에서 클릭 시 전화 연결됩니다.

 


 

전시 상황에서의 열차 운용

 

전쟁 중에도 군수 물자와 피란민, 공무 수행 인원을 실어 나르기 위해 경부선 열차는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피고인인 기관사가 운전하던 열차 역시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쉴틈 없이 수행 중이었을 것입니다. 

 

20년 차 변호사로서 제가 이 날짜를 보며 느끼는 점은 숙연함입니다. 1952년 6월이면 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후방인 부산에서도 정치적 격변(부산 정치 파동 등)이 일어났던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혼란 속에서도 법원(Judiciary)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철도 선로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에 대해 국가의 법령을 적용하고, '업무상 주의의무'라는 고도의 법리를 따져 물으며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의 생명'과 '법의 원칙'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마터」 22 객차 당시 한국 철도의 주역이었던마터형(Mountain type)’ 증기기관차를 의미합니다. 시속 20km에서 25km라는 속도는 지금의 눈으로 보면 느릿해 보일지 모르나, 당시에는 수많은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르며 전후 복구를 이끌던 육중한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마터형 증기기관차, 나무위키)

 


 

부산역에서 대전 

 

경부선의 핵심 구간입니다. 피란수도였던 부산을 떠나 내륙으로 향하는 이 열차 안에는  전쟁물자와 함께 고단한 삶을 짊어진 이들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초량역 부근의 풍경 

 

당시 초량역 인근은 철도경찰학교와 경찰대가 위치한 공공의 중심지였습니다. 판결문에 묘사된 '치안국 철도경찰학교 사무실 전 경부선'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은, 국가의 기틀을 다시 세우려던 당시의 긴박한 공적 질서를 보여줍니다.

 

피고인은 9년 경력의 베테랑 기관사였습니다. 일제시대인 1943년부터 기관사가 되어 1945년 해방후 혼란과 철도 파업 등을 겪고, 1950년 전쟁통을 겪으며 철길을 지켜온 사람이지요. 그는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전문가의 딜레마 (Professional Dilemma) 

 

9년을 매일같이 달린 길이었기에, 선로를 횡단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그에게는 일상적인 풍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늘 보던 풍경, 늘 피하던 사람들"이라는 익숙함이, 법원이 지적한 '만연(漫然, 아무런 생각 없이)'한 주의 태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과학적 검증과 주의의무: 피고인 측 변호인은 "전방 주시 의무를 다했다"고 항변했으나, 대법원은 단순한 '보기'를 넘어선 '적극적 방어 운전'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전문가일수록 자신의 감각보다 매뉴얼과 안전 원칙을 최상위 레벨에서 준수해야 한다는 법의 엄격함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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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경찰관의 죽음, 공권력조차 피하지 못한 사고

 

피해자인 공소외 4는 부산철도경찰대 소속의 경사였습니다. 누구보다 철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을 그가 선로를 횡단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점은 큰 비극입니다.

 

삶의 치열함

 

당시 선로 주변은 울타리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고, 선로는 곧 지름길이자 소통의 통로였습니다. 철도경찰관조차 업무 중 혹은 이동 중에 선로를 가로질러야 했던 열악한 환경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불가피성기대가능성 

 

피고인 측은 "피해자가 기차를 보면서 건넜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피해자가 알았든 몰랐든(지부지, 知不知), 운전사의 의무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방식을 규정한 매우 엄격한 선언입니다.

 

1955년의 봄, 그 철길 위에서 기관사는 평소처럼 레버를 잡았을 것이고, 경찰관은 평소처럼 철길을 건넜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평소'라는 익숙함이 빚어낸 한순간의 침묵(경적 불취명)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낳았습니다.

 

변호사인 제가 보기에, 판결은 단순히 형벌을 내린 기록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의 안전을 위해 어디까지 마음을 써야 하는가" 물은 인간 존재와 주의의무에 대한 오래된 질문과 답변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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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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